이번 셀럽병사의 비밀 4화의 주인공은 인류 역사상 최고의 군사 전략가 '나폴레옹'입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남주의 섬 코르시카 출신으로 원래 여기는 이탈리아 땅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폴레옹 역시 이탈리아계 프랑스인이라 할 수 있겠고요. 나폴레옹은 죽을 때까지 이탈리아 억양을 사용하며 프랑스어를 잘 사용하지 못했고 화가 나면 이탈리어로 화를 냈다고 합니다.
가난한 가정 형편 때문에 평범한 프랑스 군사학교에 입학을 했습니다. 프랑스혁명의 혼란한 시대 속 탁월한 군사적 재능으로 황제자리까지 오르게 됩니다. 유럽 전체에 프랑스혁명으로 수립된 자유주의 이념을 전파하려 노력했던 인물로 이런 대단한 사람을 시기, 질투하는 사람이 분명히 있었겠죠?
나폴레옹의 죽음엔 음모가 있었을 것이라며 이번에도 '나폴레옹의 죽음을 둘러싼 음모론'을 주장하는 이찬원을 제치고 장도연이 먼저 자신의 가설 이야기를 펼치기 시작합니다. 나폴레옹의 죽음을 둘러싼 이야기들을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나폴레옹도 무너진, 참을 수 없는 고통 치질
프랑스 황제였던 나폴레옹은 왜 영국령 3대 외딴섬 '세인트헬레나'에 빈 무덤이고 왜 이곳에 묻혀있을까? 나폴레옹의 몰락을 가져온 워털루 전투의 패전 원인으로 치질이 거론됐습니다. 1800년 5월 15일, 알프스 산을 마주한 나폴레옹은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 북부 침공을 지시했습니다. 부하들이 대포를 옮길 수 없다고 하자 대포를 모두 분해해서 나무 썰매에 실어 옮기라 지시합니다. 나폴레옹 군대는 최소한의 군장으로 알프스를 넘습니다.
이탈리아를 차지해야 유럽을 차지할 수 있었던 야심가 나폴레옹은 단시간에 이탈리아를 침공해 위세를 드높였고 주변 왕정국가들은 프랑스 벽촌 출신 하급 귀족 나폴레옹을 탐탁지 않게 여겼습니다. 자유주의를 주창하는 프랑스혁명 직후 등장한 나폴레옹이 자국에 혁명이 퍼지는 것을 두려워한 유럽 강대국이 연합을 맺고 나폴레옹 세력을 견제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프랑스 역사상 가장 많은 영토를 차지하며 국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나폴레옹은 '워털루 전투'에서 대패한 후 몰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중요한 전투를 앞두고 나폴레옹은 지각 전투를 하지 않았다면 승리했을 것이라는 설이 나왔습니다.
'대체 왜 나폴레옹은 늦었을까?' 기록에 의하면 평소답지 않게 굼뜨고 몸이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전투 몇 년 전 나폴레옹이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단서를 찾았습니다. "동생아 네가 '치질'로 고생한다며, '치질'을 없애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거머리를 서너 마리 붙여 놓은 것이다. 나도 10년 전 이 치료법을 쓴 뒤로 더는 아프지 않았다."라고 적혀있었습니다.
정맥이 부어서 생기는 것이 치핵(치질)인데 로마시대 때 '거머리를 이용한 사혈이 도움이 된다.'는 속설을 이용해 일부는 치료가 되는 것같이 보여 오랜 기간 해오던 치료법이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은 "위암"으로 사망했다?
워털루 전투에서 대패한 나폴레옹은 연합군의 포로가 됐고 영국령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배됩니다. 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집에 유배된 나폴레옹은 점점 이상한 증세를 보이며 건강이 악화되었습니다. 창살 없는 감옥, 섬 생활을 하면서 나폴레옹은 구토, 복통 등 절해고도에서 이상징후들을 보였고 혈변을 보기 시작하며 와인과 설탕물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의사가 처방한 설사약을 먹고 검은 액체를 토하게 되면서 결국 1821년 5월 5일 향년 51세에 사망하게 됩니다.
나폴레옹이 처방받은 설사약 '칼로멜'의 주성분은 독극물인 '수은'이었습니다. 수은은 아주 오래된 옛날부터 약으로 쓰였습니다. 수은을 복용하면 설사와 구토를 일으키지만 당시 의사들은 몸속에 쌓여 있던 나쁜 것이 수은에 의해 배출된다고 믿었던 것, 나폴레옹은 이미 건강이 악화된 상태에서 수은을 복용했기 때문에 죽음을 앞당긴 원인으로 추측했습니다.
또한, 이 당시 처방한 염화 수은은 일반적인 처방량의 5배에 달하는 과처방이었고 사망 다음 날 부검을 했을 때 위를 여는 순간 '불쾌한 악취와 함께 검은 액체'가 콸콸 쏟아져 나왔고 간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 부검 소견서는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영국 의사 소견서, 다른 하나는 프랑스 의사의 소견서였습니다.
영국인들은 부검을 통해 나폴레옹의 죽음이 독살이 아닌 자연사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고 나폴레옹의 죽음이 그의 건강 상태와 연관되어 있었다는 게 그들의 목표였습니다. 두 부검 소견서의 공통점 세 가지는
'위 안에 검은 액체가 차 있다. 위벽에 구멍이 있다. 내부 표면에 암성 궤양이 퍼져 있다.'였습니다. 암성궤양은 위궤양을 동반한 위암을 경우 출혈이 되는 환자들을 말합니다. 그런 환자들은 수술할 때 까만색(커피색의 액체)이 상당시 들어 있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또한, 나폴레옹의 아버지, 여동생들, 둘째 형도 비슷한 위 관련 질환을 호소하며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었고 이들의 식습관이 짜게 먹고 가공식품을 즐겨 먹은 것도 이유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나폴레옹은 "독살" 당했다? 파묘 후 너무나 충격적인 그의 시신
나폴레옹이 비소에 중독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머리카락 검사를 통해 드러났습니다. 무색무취의 비소는 약간의 단맛을 지니고 있어 음식이나 술에 타기 좋았기 때문에 유산 상속을 노리는 이들에게 악용이 되기도 했기에 '상속 가루'라는 특이한 별명을 갖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 비소는 독이 아닌 화장품, 해열제, 자양강장제 등으로 활용을 해왔기 때문에 나폴레옹의 죽음에 여향을 줬을 것이라는 의심을 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프랑스 황후가 비소를 사용해 만드는 '셀레 그린'색 드레스를 입고 나오면서 유행하기 시작했고 옷감 염료, 나폴레옹이 최후를 맞았던 세인트 헬레나 섬의 저택 벽지에서도 발견이 됐습니다.
염색할 때 사용한 비소의 양은 사람을 죽이고도 남을 만큼의 치명적인 수준이었고 벽지 안의 비소는 습하면 기화되어 공기 중을 떠다녔기 때문에 중독이 되기는 쉬었을 것이지만 독살의 증거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나폴레옹이 사망한 지 20년 후에 시신을 옮기기 위해 세인트 헬레나 섬을 찾았고 파묘 후 사람들은 깜짝 놀라게 됩니다. 시신이 부패하지 않은 창백한 시신이었고 부해하지 않았던 이유 중의 하나가 비소 중독, 사망하기 이틀 전 복용한 약이 염화 수은이었고 그리고 사망한 후 시신에서 냄새가 나니까 향수를 뿌렸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라는 겁니다.
전문가의 의견에 따르면 미라의 첫 번째 조건인 '부패를 일으키는 미생물의 차단'을 꼽았는데 나폴레옹을 매장할 때 깊게 파서 18인치의 벽에 석판으로 밀봉을 했고 관을 네 겹이나 쓰면서 납관과 주석관을 사용하고 납땜으로 밀봉을 했다는 기록을 봐서는 절대적으로 외부와 공기가 단절되게끔 만들었다고 보았습니다.
사망 후 프랑스에 묻히고 싶었던 나폴레옹은 '프랑스 땅에서,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프랑스인들 사이에 묻히고 싶다'라고 했지만 프랑스로 돌아갈 수 없었고 묘비에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라는 이름도 새길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유럽에서 황제를 상징하는 이름이 된 '나폴레옹'을 프랑스에서는 새겨줘야 한다고 했지만 영국은 이를 막았고 두 나라의 줄다리기 끝에 그의 묘비에는 그 어떤 이름도 새기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나폴레옹 시신은 사망한 지 20년이 지난 후 프랑스로 돌아가 '앵발리드 기념관'에 안치되었습니다. 세상을 호령했던 권력자였지만 말로는 외로웠던 나폴레옹이었습니다. 유명세에 비해 너무 초라했던 마지막이었습니다.